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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그리고 에세이

결국 돌고 돌아 사랑으로. 분노하는 당신을 위한 이 영화 <쓰리 빌보드>

by 포포위 2023. 2. 1.

자주 분노하던 때가 있었다. 부조리하고 불공평하고 잔인하다고 분노의 목소리를 숨기지 않던 때였다. 지금 돌아보니 그 분노는 무엇을 이루었나. 사실 분노가 이끌어 낸 변화보다도, 분노 때문에 뜻하지 않게 발생한 오해와 상처, 단절, 죽음 같은 것들이 더 기억에 남는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이 자른 무처럼 단순하고 평평하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내 상식선에서 화를 내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미친 사람처럼 분노를 해야 나의 감정을 알아줄 것이라고, 거기부터 이해받는 것의 시작이라고 믿었다.

 

 
쓰리 빌보드
“내 딸이 죽었다” “아직도 범인을 못 잡은 거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경찰 서장?” 세 개의 빌보드 광고판에 새겨진 엄마의 분노, 세상을 다시 뜨겁게 만들다 범인을 잡지 못한 딸의 살인 사건에 세상의 관심이 사라지자, 엄마 ‘밀드레드’(프란시스 맥도맨드)는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마을 외곽 대형 광고판에 도발적인 세 줄의 광고를 실어 메시지를 전한다. 광고가 세간의 주목을 끌며 마을의 존경 받는 경찰서장 ‘윌러비’(우디 헤럴슨)와 경찰관 ‘딕슨’(샘 록웰)은 믿을 수 없는 경찰로 낙인찍히고, 조용한 마을의 평화를 바라는 이웃 주민들은 경찰의 편에 서서 그녀와 맞서기 시작하는데…
평점
8.2 (2018.03.15 개봉)
감독
마틴 맥도나
출연
프란시스 맥도맨드, 우디 해럴슨, 샘 록웰, 피터 딘클리지, 존 호키스, 루카스 헤지스, 칼렙 랜드리 존스, 애비 코니쉬, 케리 콘돈, 알레한드로 바리오스, 다렐 브릿-깁슨, 젤리코 이바넥, 아만다 워렌, 말라야 리베라 드류, 샌디 마틴, 크리스토퍼 베리, 제리 윈세트, 캐서린 뉴튼, 사마라 위빙, 클라크 피터스

*디즈니 플러스 시청 가능

 

 

안젤라의 엄마 밀드레드도 나처럼 생각했다. 7개월 전 10대의 딸이 강간당하고 살해당했다. 범인은 여전히 잡히지 않았고 수사는 오리무중이다. 밀드레드는 경찰들이 소극적으로 수사하고 있다고, 아니, 방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분노를 세상에 알리기로 결심한 밀드레드는 마을 어귀의 커다란 옥외 광고판 세 개에 대한 사용료를 지불한다.

 

각각의 광고판에 한 문장 씩 커다랗게 써내려간다.

 

‘죽어가는 동안 강간당했다.’

 

‘하지만 아무도 체포되지 않았다.’

 

‘어째서지, 윌러비 서장?’

 

마을의 경찰 서장에게 대놓고 책임을 묻고자 한 것이다. 이 광고판의 효과는 실로 대단했다. 지역 방송국이 인터뷰를 하기 위해 찾아오고, 경찰들이 광고판의 책임자에게 몰려가 따지고, 윌러비 서장은 밀드레드를 만나러 직접 찾아온다. 윌러비는 밀드레드에게 자신이 말기암을 앓고 있음을 고백한다. 밀드레드의 눈빛은 잠시 부드러워지지만 곧장 단호히 대답한다.

“알고 있어요. 마을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어요. 그래도 당신이 죽고 나서 저 광고를 붙이는 건 아무 소용이 없잖아요.”

작은 마을에서 서로를 오래 알고 지내왔지만 이렇게 상대를 벼랑 끝까지 몰아야 하는 순간이 온 것이다.

 

미국 남부에 위치한 이 에빙 마을의 경찰들은 거칠고 폭력적이고 심지어 차별적이기도 하지만 윌러비 서장만큼은 공정하고 사람들에게 관대해서 존경을 받고 마을 사람들의 평판이 좋다. 사람들은 아픈 서장을 이렇게까지 몰아가는 밀드레드의 광고판이 불편하다.

 

사실 밀드레드는 딸이 죽던 날 딸과 다투며 나눈 심한 대화를 잊지 못한다. 아마 윌러비 서장을 탓하는 만큼 자신을 탓하는 건지도 모른다. 엄마가 차를 빌려주지 않자, 걸어가는 길에 강간이나 당할 것이라고 외치는 철없는 10대 딸과 꼭 그러길 바란다며 맞받아치는 매정하고 지친 엄마의 싸움은 나에게도 어느 정도 익숙해 보였다. 엄마와 딸이란 서로를 죽일 듯이 미워하고 죽을 만큼 사랑하니까. 그래서 죽을만큼 사랑한 딸이 세상을 떠난 지금 밀드레드에게 두려운 것은 없다. 사람들의 손가락질도, 윌러비를 향한 자신의 비인간적인 행동도 모두 삼켜내는 수밖에. 하지만 그도, 윌러비 서장도 가슴 깊이 이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대해 그저 속이 짓이겨지는 기분일 뿐 서로를 미워하지 않는다.

ⓒFox Searchlight Pictures

 

영화의 이야기는 곧 급물살을 탄다. 

윌러비 서장은 가족과 단란한 피크닉을 다녀온 후 기분 좋게 술취한 아내에게 키스를 한다. 잠든 아내를 뒤로 하고 긴긴 편지를 쓴 후 자신의 머리를 총으로 쏜다.

서장이 아내에게 남긴 편지는 사랑과 용기로 가득해서 그 장면을 보는 누구라도 눈물을 참긴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서장의 놀라운 면모는 그다음부터이다. 서장은 밀드레드의 광고판의 다음 달 사용료를 익명으로 지불하고, 밀드레드에게도 편지를 남긴다. 그는 마음 깊이 범인을 찾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을 털어놓고, 자신이 죽고 나면 사람들이 밀드레드를 더 탓할 것이라는 것, 게다가 그런 밀드레드를 골려주기 위해 다음달 광고비까지 미리 자신이 냈다는 윌러비다운 농담 겸 고백을 남긴다. 

뿐만 아니라 서장은 경찰들 중 가장 문제를 많이 일으키는 딕슨에게도 마음을 울리는 편지를 남긴다. 그에게 좋은 형사가 되도록 노력하길 당부하는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Because through love comes calm, and through calm comes thought. And you need thought to detect stuff sometimes, Jason. It’s kinda all you need. You don’t even need a gun. And you definitely don’t need hate. Hate never solved nothing, but calm did. And thought did. Try it. Try it just for a change.”

(왜냐하면 사랑을 통해 침착함이 오고, 침착함을 사고력을 가져오지. 형사가 되기 위해서는 생각하는 능력이 필요하거든. 아마 그게 필요한 전부일수도 있어. 심지어 총도 필요 없고, 증오는 더더욱이 필요하지 않아. 증오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지만, 침착함은 해결할 수 있지. 꼭 내 말대로 해봐. 변하기 위해 한번이라도 시도해 봐.)





영화는 전반적으로 분노가 가져오는 오해와 되돌릴 수 없는 폭력, 그리고 윌러비 서장 덕택에 시작된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과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과정을 대비하여 보여준다. 골든 글러브 상, 아카데미 상, 비평가 상 등등 수많은 상을 받은 영화답게 내용의 짜임이 쫀쫀하고 복잡하지만 직관적이다. 언어로 풀어내기 어려운 복잡 미묘한 심리 묘사가 일품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이 장면이다. 딕슨은 심한 화상을 입어 온몸에 붕대를 감고 입원한다. 딕슨이 건물에서 밀어 떨어뜨린 광고회사 주인 웰비가 같은 입원실에 있다. 딕슨을 알아보지 못한 웰비가 그에게 몸은 어떤지, 무얼 좀 마시고 싶은지 묻자 딕슨은 눈물을 흘리며 사과를 한다. 딕슨의 목소리를 듣고 그가 누구인지 눈치챈 웰비는 자신을 그렇게 만든 남자의 곁에 빨대를 꽂은 오렌지 주스를 두고 간다.

윌러비 서장의 말처럼 증오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는 걸, 사랑만이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장면이다. 윌러비 서장의 편지와 웰비의 이 따뜻한 행동은 딕슨을 변화시킨다. 

해피엔딩은 아닐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라는 쓰디쓴 약을 통해 그들은 회복할 것이고 서로를 더 깊게 이해할 거라는 희망을 주며 영화는 끝난다. 

 

ⓒFox Seachlight Pictures

 

영화 초반에 악에 찬 밀드레드와 점점 분노 대신 사랑과 이해에 다가서는 밀드레드를 보며 큰 사고를 겪은 사람들의 유족들이 생각났다. 대구 지하철 참사로 딸을 잃은 어머니는 세상을 미워하고 욕하는 대신, 자신이 마지막 슬픈 사람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살아간다. ‘당신도 나 같은 슬픔을 겪어보라’고 악다구니 하는 대신 나같은 일은 겪지 말길 바라는 사랑의 마음으로 변화를 도모한다.

 

슬픔과 아픔의 강을 건너며 분노 대신 사랑을 택하는 지혜가 나에게 늘 남아있길. 세상에 감정의 총량이 있다면 늘 사랑이 앞서길 간절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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