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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그리고 에세이

강수연 배우의 유작이자 넷플릭스 신작, 한국형 SF <정이>가 던지는 질문들

by 포포위 2023. 1. 23.

인간이 영생을 살게 된다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심리적/윤리적/사회적/법적 문제들이 발생할까? 그중에 몇 개나 인류가 해결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영원하다는 것은 ‘시간’의 가치가 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간은 매우 값비싸다. 사실상 자본에 집착하는 이유는 시간을 사기 위함이나 다름없다. 더 긴 휴가를 보내기 위해 직장의 근로 조건을 따지고, 청소나 요리에 들어가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배달을 시키거나 누군가를 고용한다. 모든 기술 또한 시간을 단축하는 방향으로 계속해서 발전 중이다. 같은 노동량 대비 짧은 시간은 고효율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에 대한 분석은 별개라고 생각한다.)

 
정이
“저희는 윤정이 팀장의 뇌 데이터로 이 전쟁을 끝낼 최고의 전투 A.I.를 만들겁니다” 급격한 기후변화로 지구는 폐허가 되고 인류는 우주에 새로운 터전 ‘쉘터’를 만들어 이주한다. 수십 년째 이어지는 내전에서 ‘윤정이’(김현주)는 수많은 작전의 승리를 이끌며 전설의 용병으로 거듭난다. 하지만 단 한 번의 작전 실패로 식물인간이 되고, 군수 A.I. 개발 회사 크로노이드는 그녀의 뇌를 복제해 최고의 A.I. 전투 용병 개발을 시작한다. 35년 후, ‘정이’의 딸 ‘윤서현’(강수연)은 ‘정이 프로젝트’의 연구팀장이 되어 전투 A.I. 개발에 힘쓴다. 끝없는 복제와 계속되는 시뮬레이션에도 연구에 진전이 없자,크로노이드는 ‘정이’를 두고 또 다른 프로젝트를 준비한다. 이를 알게 된 ‘서현’은 ‘정이’를 구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는데…전투 A.I. 정이, 연구소를 탈출하라!
평점
5.9 (2022.01.01 개봉)
감독
연상호
출연
강수연, 김현주, 류경수

 

*넷플릭스 시청 가능

어찌 됐든 인간 영생의 판타지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무섭도록 발전하는 의학 기술을 보면 오십년 뒤에는 늙고 약해진 장기를 로봇 화하거나 자기 복제를 통한 장기 배양을 한다는 말이 아주 허무맹랑하진 않다. 그렇다면 한 인간이 250년째 살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의 몸 안에는 이미 그의 것이었던 것은 거의 없다. 전부 새로운 장기들로 갈아 끼워졌고 뇌기능 또한 인공적으로 향상 혹은 유지되는 상태일 테다. 이 사람은 정말 ‘인간’인가? 생물학적 인간만을 인간으로 인정한다면 이 존재는 무엇이 되는가. 반대로 영역을 넓혀 신체적으로는 로봇에 가깝더라도 원래 인간으로 태어난 존재라면 무조건 인간으로 인정해줘야 하는가? 인간과 아주 유사한 생김새와 감정, 사고방식이 주입된 기계라면 어떠한가? 심지어 고통 또한 느낄 수 있다면?

 

이 모든 질문들을 던지게 해주는 영화<정이>가 나왔다. 

 

영화의 배경은 2135년 지구가 더이상 살아갈 수 없는 환경이 되자 다른 행성으로 이주한 인간 사회의 이야기다. 인간은 아드리안이라는 A.I로봇과 40년째 전쟁 중이다. 윤서현 무기 연구소 개발 팀장(강수연)은 35년 전 내전 용병이자 영웅이었던 자신의 어머니 윤정이(김현주)의 뇌에서 전투 데이터를 복제하여 극대화한 전투 A.I로봇을 테스트 중이다. 아이돌처럼 인기가 많았던 윤정이의 얼굴까지 꼭 닮은 로봇 수백 수천 개가 테스트를 기다리고 있다. 로봇 정이는 계속 같은 시뮬레이션에서 실패를 거듭하는 중이었다. 실패를 한 로봇은 테스트 후 폐기가 된다. 수많은 ‘엄마’를 폐기시켜야 하는 윤서현에게는 아픈 기억이 있다.

이젠 이미 엄마만큼 나이를 먹어버린 딸이 끝없이 싸워야만 하는 운명을 가진 엄마 ’로봇’에게 해줄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서현(강수연)의 머리에 총을 겨눈 연구소장_영화&lt;정이&gt;
사진 넷플릭스/ 클라이맥스 스튜디오 제작

 

<여기서부터 약 스포>


윤서현은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다. 암이 전이되어 수술도 불가능한 상태. 차분한 눈을 가진 의사는 차근차근 선택지를 설명해 준다. A타입 B타입 C타입의 의체가 있으며, A급 의체는 인간의 뇌를 복제한 후 의체(로봇일 것이다)로 ‘옮겨 사는 경우’이며 인간과 동등한 대우를 받으며 살 수 있다. B타입 의체에겐 결혼과 거주 이동 등에 있어 일정한 제한이 따르고 뇌 복제 데이터를 정부 기관에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다. C타입 의체의 경우는 모든 뇌 데이터를 공기업 혹은 사기업에게 넘기고 어떤 식으로 활용되는지 관여할 수 없다. C타입의 경우 기업의 이윤 원칙에 따라 무수한 클론으로 재생산될 수도 있으며 인격체로 인정되지 않는다. 이 등급은 물론 ‘돈’으로 나뉜다. 돈이 있으면 A타입으로 돈이 없는 사람이라면 무료인 데다가 일정의 위로금을 받는 C타입으로 선택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윤정이 역시 C타입이기에 무기 회사에서 그의 뇌 데이터를 이용해 A.I 전투 로봇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후반부로 갈수록 기업이 한 개인의 뇌 데이터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존엄마저 어떻게 무너뜨릴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A타입, B타입, C타입 방식으로 카테고리화된 시스템은 낯설진 않다. 자본주의를 사는 우리는 매일매일 A냐, B냐, C냐를 선택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 선택이 인간의 권리에 관한 것일 때, 존엄에 관련된 것일 때 우린 아주 신중해져야 한다. 예를 들어 내 지갑 사정을 고려해서 오마카세를 먹을건지 편의점 김밥을 먹을 건지 정도를 용인되는 수준의 자본주의라고 치자. 내가 만약 지갑 사정이 안 좋다는 이유로 내 장기를 합법적으로 팔 수 있다면, 그래서 또 부유한 누군가는 기다림 없이 바로 장기 이식을 받을 수 있다면 이것은 생명권이 달린 중차대한 사안이다. 자본의 힘이 뻗쳐야 할 곳 이상이라는 말이다. 물론 현실에선 이 같은 일이, 이보다 더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보호 시스템과 제도에 늘 허점이 있기 때문인 걸까. 우린 이 다가오는 미래에 대해 만반의 준비를 다 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세세한 법과 제도 없이 인간의 영생은 그저 추악한 몸부림에 지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차창 밖을 바라보는 서현(강수연)의 사진_영화&lt;정이&gt;
사진 넷플릭스/ 클라이맥스 스튜디오 제작

전체적으로 영화는 아쉬웠다. 서사도 아쉽고 배우들의 연기와 대사도 아쉬웠다. 조금더 세밀한 짜임이 있었다면, 조금 더 깊이 있는 대사가 있었다면 더 깊이 몰입할 수 있었을 것 같다. 엄마와 딸의 사랑을 다루는 가족 드라마와 SF 그 중간에서 조금 길을 잃은 느낌이다. 하지만 정말 곧 다가올 미래에 대해 여러 질문을 던지게 한다는 점에서는 킬링타임 그 이상의 역할을 해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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