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을 겪지 않은 지 여러 해가 지났다. 몇 년 전 4월에 한국에 갔다가 어찌나 추운지 온몸이 긴장을 해서, 밖에서 음식을 먹는 족족 체하는 바람에 고생을 했다. 나는 이제 겨울이 낯선 인간이 되어버렸지만, 추위에 대한 어렴풋한 감각은 남아있다.
따뜻한 털부츠와 도톰한 양말을 신고도 발을 웅크리게 하는 추위, 칭칭 둘러 맨 목도리 밖으로 내놓은 볼을 칼로 베는 듯한 바람, 곱은 손가락이 굳어서 휴대전화의 버튼을 누르기도 어렵던 찬 공기. 한국의 추위도 물론 맹렬한 편이지만 언젠가 러시아 친구가 보통 영하 29도 까지는 등교를 해야 하고 영하 30도가 되면 휴교를 한다는 말에 기함을 한 적이 있다. 영하 30도는 도대체 어떤 추위일까?
이 책은 한겨울에 산장으로 스키 여행을 떠났다가 차사고를 겪고 조난 당하는 두 가족들의 이야기이다. 산장으로 떠나기 전 인물들의 성격을 보여주기 위해 이런저런 일상을 보여주는데, 주인공 ‘나’는 핀이라는 16살 소녀다. 아주 팔팔하고 유쾌하고 활동적인 아이다. 그래서 독자들은 사고 직후 “나는 죽었다.”라고 시작되는 챕터의 첫 문장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주인공 ‘나’를 죽임으로써, 그리고 그의 영혼이 원하는 대로 순간이동을 할 수 있게 장치를 만듦으로써, 서사는 날개를 달고 뻗어나간다. 조난을 당한 후 도움을 구하겠다고 길을 나선 둘째 언니와 둘째 언니의 남자친구의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는 것도,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 또다시 길을 나서는 핀의 엄마와 카일(자신의 차가 고장 나서 우연히 가족의 차에 합승하게 된 10대 남자) 이 겪은 일을 설명할 수 있는 것도 다 이 영혼의 순간이동 덕분이다. 각자의 발자취는 철저히 핀의 시각으로 보이고 평가되지만, 글을 읽는 독자는 이미 거부할 수 없는 공감과 응원을 하고 있다.
그들이 당한 부상과 추위, 공포가 정말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어서 마치 읽는 사람도 그 뒤집어진 차에 함께 웅크려 있는 기분이다. 하지만 사고 상황보다 더 날 것으로, 생생하게 묘사된 것이 있다. 극한의 상황에서 아주 묘하게 그리고 분명하게 존재하는 경계심과 이기심이다. 특히 핀의 가족과 친한 사이라서 함께 여행을 온 밥과 캐런, 그들의 딸 나탈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나갈 생각보다는, 자기 가족들의 안위에 더 집중한다. 캐런은 핀의 엄마가 죽은 핀의 몸에서 옷을 벗겨 핀의 가장 친한 친구 모에게 옷을 건네자 서운함을 감추지 못한다. 밥은 자폐증을 가진 핀의 동생 오즈가 위험하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오즈를 데리고 차 밖으로 나가 엄마를 찾으러 가는 게 어떻냐고 꾀어낸다. 그뿐만이 아니라 오즈에게 크래커 두 봉을 건네고 그 댓가로 장갑을 달라고 한다. 그렇게 강아지 빙고와 길을 떠난 오즈는 결국 구조되지 못하고 죽는다.
구조가 되고 치료를 받는 도중 혹은 받은 후에도 대부분의 인물들은 육체적으로 그리고 심리적으로 사고의 영향을 받는다.
책에는 사고 이후 인물들이 겪는 우울과 죄책감을 설명하며 이런 구절이 있다.
그들의 양심은 끊임없이 아우성을 치고, 그들의 뇌에서는 ‘했어야 할 일’과 ‘했으면 좋았을’ 일들이 끊임없이 떠오른다. 그들은 지금 자신의 모습을 견딜 수가 없다. 자신들의 진정한 상(像)은 너무나 선명하고, 추하며, 너무 잔혹하고 정직하다. (...)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그렇게 숨김없이 적나라하게 봐서는 안 되며, 또한 우리의 본성이 날 것 그대로 드러나서도 안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단 한 사람, 밥만이 사고 이후에도 별다른 죄책감없이 일상을 영위하고 나아가 관심을 즐기기까지 하는데, 핀은 이런 밥에게 ‘참회의 결핍’이라는 축복을 받았다고 판단한다.
도무지 괜찮아지지 않을 것 같던 사고의 생채기, 특히 딸 핀과 막내아들 오즈를 잃은 핀의 부모들의 상처는 오랜 시간에 거쳐, 곪아서 터져 나왔다가 다시 아물다가, 또 딱정이가 뜯어져 피가 나다가 그 위로 더 두꺼운 딱정이가 앉는 시간을 통해 단단하게 아문다.
구조를 요청하는 길에 넘어진 자신을 두고 간 남자친구를 여전히 사랑하는, 그래서 죽음을 계획하는 주인공의 둘째 언니 클로이도 어미 잃은 아기 고양이에게 ‘핀’이라는 이름을 붙여 키우고 동물 보호소에 나가 봉사를 시작하며 천천히 나아진다.
핀의 가장 친한 친구 모는 사고 당시 밥이 오즈의 장갑을 받아들고 혼자 돌아온 것을 이상하게 여겨 사건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조사관 번스와 그런 의혹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 결국 밥은 과실치사에 대해 재판을 받게 된다.
결국 모든 이들이 다시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기 위한 발걸음을 뗄 때, 핀의 영혼은 자유로워져 떠날 수 있게 된다. 상황 묘사도 상당히 좋지만, 감정 묘사가 어찌나 일품인지 읽는 중간중간 눈물을 흘리며 읽었다. 적지 않은 양인데 하루 만에 훌훌 읽을 정도로 몰입도가 좋다.
밥이나 캐런도 평소에는 자선 봉사에 적극적인 아주 좋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어려운 상황이 닥치자 이타적인 행동 대신에 자신과 자신의 딸을 앞세웠다. 우리가 이걸 ‘나쁘다’고 평가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이 안전하고 풍족할 때 사람은 관대하고 이타적이기 쉽다. 풍요로운 상황에서도 이기적이고 비겁한 이에게는 변명의 여지가 없지만,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의 비겁함은 비난받아 마땅한 자질인가 고민하게 된다. 이것은 비겁함인가, 생존 본능인가?
반면 같은 상황에서도 인간성과 이타심을 잃지 않은 인물들도 있다. 핀의 엄마와 함께 구조 요청을 하기 위해 길을 떠난 카일이 그랬고, 핀의 가장 친한 친구 모가 그랬다. 그들은 두려움을 무릅쓰고 약자를 보호하고 서로를 챙기려는 인간성을 지켜냈다.
책을 읽는 내내 어떤 일에 대해 겪지 않고도 당사자들의 행동에 대해 판단을 내리던 사람들이 생각났다. 나도 물론 그런 사람들 중에 하나다. 일제 강점기 시대에 적극적으로 나서 싸우지 않은 일반인들, 독재 정권 아래 쉬쉬하고 눈을 내려 깔고 살던 소시민들, 가라앉는 배에 아이들을 내팽개치고 혼자 살기 위해 탈출한 어른들…
극한의 상황에서 튀어나오는 비겁함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게 한 책이었다. 당위와 도덕, 인간성 같이 우리가 대체로 아는 상식이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에선 어찌 작용하게 될지는 지금 우리 자신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미 벌어진 일을 판단하는 입장에선 잘잘못을 따지기는 쉽다. 과연 우리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극한의 상황에서 인간성을 지켜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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