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 지치는 날에 읽게 되는 책들이 있다. 그중에도 고 박완서 작가님의 책과 최은영 작가님의 책은 읽으면 읽을 때 마다 이리저리 까져서 나풀거리던 마음의 표피가 단단히 여며지고 토닥여지는 느낌을 받는다. 글 쓰는 것을 즐기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자면 어쩜 이런 곱고 다정한 문장들을 썼을까, 감탄이 비눗방울 터지 듯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 저자
- 최은영
- 출판
- 문학동네
- 출판일
- 2021.07.27
최은영 작가님의 <밝은 밤>은 이미 여러 차례를 읽었다. 처음엔 정말 단숨에 읽어 내려갔고 그게 아까워서 다 읽자마자 다시 첫 장으로 돌아갔었다. 그 후에도 나를 포함한 ‘사람’이 지긋지긋해지는 때마다 들여다본다. 그야말로 “인류애 충전소”랄까.
인류애 충전소라니까 그저 밝고 따뜻하기만 한 이야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책의 줄거리만 늘어놓자면 오히려 너무 고된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소설은 여자들의 연대와 우정, 오해, 이해, 화해로 이루어져있다. 전체의 이야기를 실어 나르는 화자 ‘나’ 지연과 그의 엄마 미선. 외할머니 영옥, 증조모 삼천이와 벗 이상의 마음을 나눈 새비, 새비의 딸 희자와 새비의 친척 명옥 할머니까지. 여자들의 귀한 마음이 얽히고설켜 시공간을 뛰어넘는 위로를 건넨다.
남편의 외도로 이혼을 하고 정신이 피폐해진 주인공 지연은 어릴 적 갔었던 해변 시골 마을로 일을 하러 간다. 단지 일때문에 간다고 할 순 없고 도피에 가깝다. 그곳에서 엄마와의 불화로 인해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외할머니를 우연히 재회하고, 할머니의 엄마, 즉 증조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증조할머니의 젊은 시절은 일제 시기를 거쳐 한국 전쟁이 발발하던 때였으니 객관적으로는 ‘밝고 따뜻한 이야기’라고 볼 순 없다. 지극히 고생스러운 삶이다. 하지만 백정의 딸로 태어나 늘 괄시받고 외로웠던 증조할머니 삼천이를 편견 없이 아껴준 새비의 마음, 전쟁이 만든 의심과 피폐함 속에서도 명옥할머니가 지켜낸 연대와 보호는 전쟁을 모르는, 배고픔을 모르는 세대인 나의 마음마저 뜨끈하게 녹인다. 자연스럽게 증조할머니에게서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할머니의 인생 이야기까지 흘러오고 ‘나’는 엄마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이해하게 된다.
책을 읽는 중간중간 나는 벅차오르는 마음에 눈물을 쏟고, 인물이 말한 내용을 찬찬히 육성으로 따라 읽고, 활자를 손가락으로 천천히 만져보기도 한다.
그 중 내가 사랑하는 두 부분을 공유하고자 한다.
“나는 내게 어깨를 빌려준 이름 모를 여자들을 떠올렸다. 그녀들에게도 어깨를 빌려 준 여자들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이렇게 정신을 놓고 자나, 조금이라도 편하게 자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마음. 별것 아닌 듯한 그 마음이 때로는 사람을 살게 한다는 생각을 했다. 어깨에 기대는 사람도, 어깨를 빌려주는 사람도. 구름 사이로 햇빛이 한 자락 내려오듯이 내게도 다시 그런 마음이 내려왔다는 생각을 했고, 안도했다.”
<밝은 밤> 中
“내가 지금의 나이면서 세 살의 나이기도 하고, 열일곱 살의 나이기도 하다는 것도. 내게서 버려진 내가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사실도. 그 애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관심을 바라면서, 누구도 아닌 나에게 위로받기를 원하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밝은 밤> 中
이 부분들은 그저 이 책의 일부이다. 이 책의 하이라이트가 아니다. 사실 이 책에선 하이라이트라거나 클라이막스랄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전부를 읽어야 온전히 하나가 되는 이야기기에.
최은영 작가님이 이 책을 쓸 때 처럼, 소복이 쌓인 눈을 바라보며 따뜻한 차 한 잔을 곁에 두고 이 책 읽어보길 바란다.
그리고 당신 마음에도 충만한 평화에 젖어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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