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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그리고 에세이

무기력증과 번아웃을 겪는 영혼들을 위한 영화, <Wild>

by 포포위 2023. 1. 11.
 
와일드
가난한 삶, 폭력적인 아빠, 부모의 이혼으로 불우했던 유년 시절을 지나 엄마와 함께 행복한 인생을 맞이하려는 찰나, 유일한 삶의 희망이자 온몸을 다해 의지했던 엄마가 갑작스럽게 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엄마의 죽음 이후 인생을 포기한 셰릴 스트레이드는 스스로 자신의 삶을 파괴해가고… 그녀는 지난날의 슬픔을 극복하고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수 천 킬로미터의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극한의 공간 PCT를 걷기로 결심한다. 엄마가 자랑스러워했던 딸로 다시 되돌아가기 위해..
평점
8.2 (2015.01.22 개봉)
감독
장 마크 발레
출연
리즈 위더스푼, 로라 던, 토마스 사도스키, 킨 맥레이, 미힐 하위스만, W. 얼 브라운, 가비 호프만, 케빈 랜킨, 브라이언 반 홀트, 클리프 드 영, 모 맥레이, 윌 커디, 리 파커, 닉 에버스맨, 레이 버클리, 랜디 슐먼, 캐트린 드 프룸, 찰스 베이커, J.D.에버모어, 베스 홀, 얀 호아그, 제닌 잭슨, 오리아나 헤르만, 테드 루니

*디즈니 플러스 시청 가능

 

강아지를 입양하고부터는 산책의 풍경이 많이 달라졌지만 나는 여전히 산책 예찬론자다. 

운동과는 거리가 먼 내가 산책을 시작하게 된 건 순전히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다. 전 포스팅에서도 밝혔듯 외국인으로 살아가는 내겐 갑갑하고 무기력한 날들이 많았다. 침잠하는 마음을 누군가에게 하소연하는 것도 한두 번. 각자의 짐을 짊어진 우리는 상대의 부정적인 감정에 한없이 너그러울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설사 그런 관대한 친구가 있다한들 각자의 상황이 다르니 서로를 이해할 수는 없었다. 실제로 나는 종종 외롭고 힘든 마음을 한국에 가까운 친구들에게 털어놓았지만 그들에게선 ‘그래도 그런 곳에 사니 부럽다’라는, 내 마음과는 동떨어진 답변이 돌아왔을 뿐이다. 일정 기간이 지난 후로는 여전히 방황하는 내가 왠지 부끄러워져서 그런 고민 상담마저 관두었다.

모두가 바삐 세상을 살아가는 어느 한 낮 나는 침대에 널브러져 울고 있었다. 더이상 칠 바닥도 없는 루저처럼 느끼며. 그럼에도 아무에게도 이 나약함을 들키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며. 너무 답답해 무작정 나가 걸었다. 차도 돈도 없는 내겐 할 수 있는 게 그뿐이었다. 

 

그렇게 산책을 시작했다. 뙤약볕 아래에서도 걷고,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맞으며 걷고, 새벽에도 걷고, 맹그로브 숲을 걷고, 공원을 걷고, 울면서도 걷고, 바닷가를 걷고, 노래하며 걷고, 차도 옆 아지랑이가 올라오는 인도를 걸었다. 걷는 동안엔 부정적인 감정들이 좀 가라앉고 차분하게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일의 앞 뒤가 보이고 설명할 수 없던 감정들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길가의 묘하게 생긴 백향과의 꽃을 구경하고, 반짝이는 딱정벌레들의 행진에 넋이 팔리고, 해변에서 조개껍질을 줍거나 맹그로브 게들의 치열한 집게 다툼을 보며 나는 세상 모든 곳에, 심지어 보이지도 않는 곳에도 여전히 생의 전투가 존재함을 배웠다. 나도 모르는 새에 위로를 받고 있었다.

 

신발을 절벽아래로 던져버리는 셰릴
ⓒ20th Century Fox

영화는 주인공 셰릴이 높은 산 바위에 걸터앉아 이미 피가 나고 덜렁거리는 발톱을 뽑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고통에 진저리를 치며 발톱을 뽑는데, 벗어둔 신발 한 쪽이 바위 저 아래로 굴러 떨어진다. 분노한 셰릴은 악을 지르듯 욕을 하며 나머지 한쪽도 산 아래로 집어던져버린다. 셰릴은 4270km에 달하는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acific Crest Trail), 즉 PCT를 횡단하는 중이다. 그것도 걸어서. 사막을 넘고 설산을 지나는 세 달의 강행군을 혼자 하는 건 그저 특별한 취미 활동이 아니다. 셰릴은 기나긴 방황과 무기력의 시간에서 벗어나는 중이다.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유일한 구원이었던 엄마. 비현실적으로 해맑고 다정하던 엄마가 암으로 죽고 나자 셰릴은 끝없이 곤두박질쳤다. 마약을 하고 방탕한 성생활을 이어가고 자신을 사랑하는 남편을 상처 입히며 결혼생활마저 파괴한다. 셰릴은 엄마의 죽음을 제대로 애도하지 못하고 그저 아끼고 사랑하는 모든 것을 파괴한다. 

마약에 망가진 셰릴
ⓒ20th Century Fox

 

PCT을 걷는 것은 하이킹 숙련자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하물며 하이킹이 처음인 셰릴에겐 텐트를 치는 것부터 음식을 먹는 것 까지 모든 것이 난관이다. 실제로 셰릴은 규격이 맞지 않는 가스통을 사 오는 바람에 한동안 불을 사용하지 못한다. 차가운 물에 적신 시리얼을 우적우적 씹으며 며칠을 버틴다. 셰릴은 걸음을 옮기는 모든 순간 자신의 과거를 회상한다. 아름다운 기억도, 추악한 기억도 모두 끄집어낸다. 나는 그런 반추의 행위가 익숙하다. 나도 오랫동안 숲길을 걸으며 그런 것을 하곤 한다. 마음껏 그리워하고, 반성하고, 애도하고, 결국엔 흘려보내는 일이다. 셰릴은 남편과 이혼을 하는 장면도 떠올린다. 이혼 후 새로 자신이 갖고 싶은 성씨를 선택할 때 strayed(떠도는, 방황하는)을 고른다. 그리고는 말한다.

“it just sounded right.” (그게 딱 맞는 성씨같아서요.)

 

셰릴은 PCT 곳곳에 비치된 여행자용 방명록에 늘 책의 한 구절을 남긴다. 작가의 이름을 쓰고 자신의 이름을 밑에 쓴다. 나는 그 구절들이 셰릴의 심경을 대변한다고 믿는다. 아름답고 섬세한 문장들이 많으니 영화를 보며 직접 확인해 보시라. 엄마의 암이 급속도로 악화되는 동안에도 세상은 아무렇지도 않게 굴러가고 사람들은 자기의 삶을 산다. 영화에선 그것을 단편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셰릴이 엄마의 병문안을 마치고 돌아가다가 세인트 패트릭 데이(St.Patrick’s day)를 축하하며 파티를 하는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보는 장면을 넣는다. 내가 침대에 엎드려 울던 낮에 느낀 기분과 이때 셰릴의 마음이 비슷했을까. 나의 세계만이 고립된 기분, 나만 우울의 구덩이에 멈춰있는 단절감.

 

회상의 조각 중 셰릴이 엄마의 죽음을 맞닥뜨리는 순간이 산 위에서 발톱에 피를 흘리며 신발을 던져버리는 순간과 겹쳐진다. 그 두 순간 모두 셰릴은 분노에 찬 비명을 지르고 있다. 욕이지만 비명이고 비명이지만 욕이다. 그리고 대책 없는 절망 후에는 늘 현실이 있다. 과거의 셰릴은 자신을 파괴했지만, PCT를 걷는 셰릴은 피나는 발 위에 양말을 신고 그 위에 샌들을 신은 후 덕트 테이프로 단단히 동여매고 다시 길을 나선다. 물살이 센 강을 지팡이를 짚고 꿋꿋이 건넌다. 새로운 셰릴이다. 현실을 마주 보는 셰릴이다.

 

나도 산책을 하며 눈물을 말렸다. 좁은 방 안에 주저앉아 있는 대신 몸을 끌고 나와 햇볕을 쬐고 다리힘을 길렀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누군가가 지금 그런 무기력을 겪고 있다면, 갈 곳 잃은 방황을 하고 있다면 말해주고 싶다. 아무것도 망가지지 않았다. 무기력에는 끝이 있다. 다만 그 ‘끝’이 스스로 다가오지 않는다. ‘끝’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 건 결국 우리 자신이다. 

고요한 강가를 하이킹하는 셰릴
ⓒ20th Century Fox




*이 글을 읽는 독자는 내가 영화에 대해 지나치게 많은 것을 이야기한 것처럼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아니다. 이 영화가 담고 있는 내용은 더욱 방대하고 와일드하고 깊다. 내가 다루지 않은 부분 중에도 중요하고 흥미로운 장면이 많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이야기는 실제 이야기다. 진짜 셰릴 스트레이드가 자신의 이야기를 쓴 책을 읽고 깊이 감명받고 공감한 배우 겸 프로듀서인 리즈 위더스픈(영화 속 셰릴)은 곧장 셰릴에게 연락을 했다고 한다. 리즈가 셰릴에게 한 말은 아마 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이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셰릴, 당신 책을 읽었어요. 난 당신을 모르지만… 그런데 어쩐지 당신을 잘 아는 것 같아요”

셰릴이 던진 신발을 찾은 하이커
Tim pate

*영화에 관한 또 다른 재밌는 이야기는 영화 속에서 리즈 위더스푼이 산 아래로 던져버린 신발을 한 하이커가 여행 중 찾았다는 것! 만약에 이 영화를 감명 깊게 본 하이커였다면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 실제로 신발을 찾은 남자의 아들은 Reddit에서 이 신발을 잘 보관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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